미루기의 본질: 감정 회피와 실행 의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지나가면, 그다음에 남는 건 종종 ‘미뤄둔 것들’이었습니다. 몸이 조금 돌아오면 바로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손은 또 멈추더라고요.
저는 지금 집안일을 전부 미뤄둔 상태입니다. 겨울 옷을 정리하고 봄 옷을 꺼내야 하는데 손이 안 가고, 아이들 책상에 쌓인 지난 학년 교재들도 그대로예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같은 핑계를 대충 만들어보지만 사실은 그런 말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하기 싫다기보다는 막상 시작하면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고 생각보다 일이 많을 것 같고 중간에 멈추면 더 지저분해질 것 같은 느낌이 먼저 올라오거든요.
그래서 저는 어느 순간 이런 결론에 도착했습니다. 미루는 사람은 보통 ‘일’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시작할 때 올라오는 느낌을 피한다는 것. 저는 옷장 정리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옷장 앞에 섰을 때 몸 안에서 올라오는 막막함이 싫었던 거예요.
미루기는 ‘게으름’이 아니라 ‘감정 회피’에 더 가까울 때가 있다
옷장 정리를 떠올리면 제 머릿속에서는 질문이 연달아 튀어나옵니다. “어디서부터 하지?”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리면 어쩌지?” “중간에 그만두면 더 엉망일 텐데?” 이런 질문들은 사실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오는데 동시에 저를 멈추게도 합니다. 그 질문들이 만들어내는 감정이 너무 불편하니까요. 부담, 불안, 귀찮음, 귀찮음보다 더 큰 막막함.
그래서 저는 미루는 동안 잠깐 편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느낌’을 잠깐 피한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편해진 만큼 또 무거워집니다. 일이 줄어든 게 아니라 그대로 쌓였으니까요. 결국 미루기는 휴식이 아니라 회피가 되고 회피는 잠깐의 편안함을 주지만 다음날 더 큰 압박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부터는 자책이 붙습니다. “왜 난 이걸 못 하지?” “이 정도도 못 하면 어떡해?” 저는 이 자책이 미루기를 더 키운다고 느꼈어요. 자책은 일을 작게 만드는 게 아니라 시작을 더 무겁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결론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나는 게으르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느낌을 피하고 있지?”로요.
실행 의도는 의욕을 기다리지 않고 시작을 낮추는 방식이다
저는 예전엔 의욕이 생기길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욕은 잘 안 오더라고요. 오히려 “해야 한다”는 말만 커졌고 그 말이 커질수록 시작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때 도움이 됐던 게 ‘실행 의도(implementation intention)’라는 방식이었어요. 심리학자 피터 골위처는 목표를 크게 외치는 것보다 “어떤 상황이 오면 나는 이 행동을 하겠다”를 미리 정하는 것이 행동을 실제로 옮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Gollwitzer, 1999). 저는 이게 좋았던 이유가 분명해요. 의욕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시작을 ‘조건’에 묶어둘 수 있었거든요.
저는 요즘 이렇게 씁니다.
“만약 저녁을 먹고 나면 옷장 문을 열고 겨울 옷 5벌만 꺼낸다.” (Gollwitzer, 1999)
포인트는 두 가지예요. 트리거는 이미 늘 하는 행동과 붙일 것. 행동은 작게 쪼갤 것. “옷장 정리”는 부담스럽지만 “문 열고 5벌”은 아직 할 만하거든요.
그리고 재미있는 건 저는 이걸 하고 나서야 그 다음이 보였다는 점입니다. 시작 전에는 ‘전체’만 보이는데 시작을 하고 나면 ‘다음 한 칸’이 보이더라고요. 물론 어떤 날은 5벌만 꺼내고 끝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날의 목표는 ‘완성’이 아니라 ‘착수’였으니까요.
마무리
미루기를 줄이는 데 제일 도움이 됐던 건 “더 열심히 살자”가 아니라 “시작을 낮추자”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미룹니다. 다만 예전처럼 그걸 성격 문제로만 몰아붙이진 않으려고 해요. 집안일을 미루는 날이 곧장 ‘나태함’의 증거는 아닐 수 있으니까요. 그날의 저는 일을 피한 게 아니라 막막함을 피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의욕을 끌어올리기보다 문장 하나만 붙여두려고 합니다. “저녁 먹고 나면 옷 5벌만.” 이 정도면 제 하루를 망치지 않고도 미루기의 고리를 아주 조금은 느슨하게 만들 수 있더라고요.
참고문헌
- Gollwitzer, P. M. (1999). Implementation intentions: Strong effects of simple plans. American Psychologist, 54(7), 493–503. https://doi.org/10.1037/0003-066X.54.7.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