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왜 반갑고도 피곤할까: 가족 의례와 역할 피로의 심리
명절 전날이 되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분주해진다. 아직 출발한 것도 아닌데 짐을 챙기고 선물을 고르고 가족 단톡방을 한 번 더 확인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쪽은 벌써 긴장하고 있다. 명절이 피곤한 이유를 우리는 흔히 이동 거리나 집안일에서 먼저 찾는다.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명절의 피로는 생각보다 더 복합적이다. 단순히 할 일이 많아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여러 역할이 한꺼번에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절은 쉬는 날이면서도 마음을 많이 쓰게 되는 시간이 된다. 명절은 가족 의례이기 때문에 더 복잡하다 명절은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해마다 반복되고 가족이 함께 지켜야 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다가 서로가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가족 의례에 가깝다. 가족 의례와 루틴은 가족의 안정감과 정체감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논의가 있다(Fiese et al., 2002). 같은 음식을 준비하고 비슷한 순서로 인사하고 익숙한 사람들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만든다. 그래서 명절은 분명 반가운 시간이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가족이라는 소속감을 느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반복성 때문에 피로도 함께 커질 수 있다. 의례에는 기대되는 역할과 분위기가 있고 그 기대를 어긋나지 않게 맞추려는 힘도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명절의 피로는 역할이 겹칠 때 커진다 평소에는 한 가지 역할로만 살 수 있는 날이 많다. 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 지내고 집에서는 부모나 자녀의 역할로 지내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조금 편한 사람으로 지낼 수 있다. 그런데 명절은 다르다. 한 자리에서 여러 관계가 한꺼번에 소환된다. 누구에게는 여전히 자녀여야 하고 누구 앞에서는 예의를 갖춘 어른이어야 하며 또 다른 관계 안에서는 친절한 친척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 역할들이 늘...